2.28 대구 학생의 거는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60년 2월 28일 3.15 대선을 앞두고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여 대구시에서 일어난 학생의거로, 2.28 의거는 이후 3.15 마산 의거와 4.19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2월 28일 대구 학생의거'의 발단
민주당 정. 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유세일 당일은 일요일이었지만, 학생들이 민주당 유세장에 못 나가도록 당국이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 2.28 대구 학생의거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경북고등학교는 일요일인 이날에 등교 지시를 내립니다. 이유는 3월에 있을 중간고사를 앞당겨서 친다는 이유였습니다. 대구 시내에 있던 다른 국공립 고등학교 7곳 역시도 일요등교를 지시하게 됩니다. 이유는 토끼 사냥, 영화 관람과 같은 이유도 있었습니다.
1960년 2월 27일 오후 대구 동인동 이대우 경북고등학교 학생부 위원장 집에 경북고등학교, 대구고등학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학생 8명은 부당한 일요등교 지시에 항거를 하기 위해서 시위를 조직했으며,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서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는 결의문도 작성했습니다. 2월 28일 오후 1시 학생 800여 명이 대구 반월당을 거쳐서 경상북 도청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더욱 커졌고 도중에 유세장으로 가던 장면 박사를 만났을 때는 '만세'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경상북도지사는 학생들에게 '이놈들은 전부 공산당'이라고 말하는 반면에, 시민들은 구타당하는 학생을 경찰에게 달려들어 말리고 박수를 쳤고, 치맛자락에 모자를 감춰 학생을 숨겨주는 부인이 대부분이었습니다.
1,200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를 했으며 그중 120여 명이 경찰에게 체포됩니다. 그러나 경찰은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하여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학생들을 풀어주게 됩니다.
2월 28일 운동의 추체
2.28 운동은 고교생들이 주체이며, 계획적 조직 시위의 민족운동 조건을 갖춘 학생 운동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상 1926년 6.10 만세운동,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이은 의거로 전후 학생 운동의 효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4.19 혁명의 도화선으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고, 한일 수교 반대와 그 이후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대구는 바로 1,200여명의 학생들의 '민주화 함성' 도가니로 변했습니다. 이때는 발췌 개헌(1952), 사사오입 개헌(1954), 진보당 사건(1958) 등 자유당 정권의 실정에 분도 하였으며, 대통령 선거(3.15)가 다가오는 시기였습니다.
기념사업과 결의문
1961년 4월 10일 매일신문이 주관하여 대구시민 성금으로 명덕로터리에 2.28 대구 학생기념탑을 세웠습니다.
1990년 2월 28일 2.28기념탑을 명덕로터리에서 두류공원으로 이전하였습니다.
1999년 2월 28일 문 대구시장은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동에 위치한 대구중앙초등학교 부지를 2.28 민주의거 기념공원으로 조성할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경북고등학교에 2.28기념탑과 작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결의문 :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1960년 2월 28일 오후 12시 55분, 경북고등학교 학생부 위원장 등이 조회단에 올라 격앙된 목소리로 결의문을 읽자 흥분이 고조된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반독재의 횃불은 이처럼 대구에서 처음 불타올랐습니다.
댓글